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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운동과 공동체 (by 도법스님)

문화 | 2009/06/08 12:32 | Posted by 난장지기

 

생명평화로고와 단순 소박한 삶,

그리고 공동체 마을 운동

                                                                                                                                                글 / 도법스님

  Ⅰ. 들어가는 말

  올바른 현실 인식 1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명평화 세상을 꿈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생명평화 세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근본적인 원인의 한 가지가 바로 보편적 진리에 어긋나는 실체론적 세계관과 이분법적 방법론 때문이다. 또는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내 생각과 내 지식대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싸워서 내가 이기고 내가 지배하면 평화로워진다 또는 상대편을 제거하고 모두 내 편으로 만들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고 여겨왔다. 실제는 어떨까? 예를 들어보자. 60억 인구가 전부 기독교인이 되면 세상이 평화로워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인들 간의 극단적인 불신과 갈등과 대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싸워서 이기고 모두 한 편이 되고 내가 지배한다고 해도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차피 싸움일 수밖에 없지만, 평화를 짓밟고 위협하고 파괴하는 부당함에 대해 진리의 정신인 비폭력 불복종 행동으로 비판하고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올바른 현실 인식 2

  21세기 우리 현실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발전했다. 일찍이 오늘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아본 역사는 거의 없다. 그런데 결과로서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첫째, 자연 생태적 저항이 인류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 보면 문명사 이래 최고의 위기 상황이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현대인들의 바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인류의 문명 자체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인류 문명이 총체적 파국으로 질주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다.

  다음은 극단적인 양극화가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당연히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했으면 양극화는 더 줄어들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더 극대화되고 있다. 양극화가 더 극대화되어지면 어디, 누구에 의해 어떤 형태로 폭발할지 알 수는 없지만 대단히 위험한 상황들이 계속 확대 증폭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 번째는 인간 소외가 삶을 황폐화하고 있다. 먹는 것도 풍족해지고 생활도 편리해졌지만 삶이 편안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다. 자유롭지도, 여유롭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사람 관계도 인생의 이웃이나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이고 적대자뿐이다. 삶이 공허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답답하고 불안, 초조하다.

짚어본 것을 정리하면 생명 위기, 평화 위기, 삶의 위기로 요약된다. 이것이 21세기 현대사회의 현주소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갖게 된다.

 하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이다. 자연 생태, 사회 양극화, 인간소외 문제가 왜, 누구 때문에 발생했을까? 문제의 주범은 진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세계관을 갖고 인간중심,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인간이고 자기 자신이다. 문제를 정직하게 사실적으로 짚어보면 결국은 지금 여기의 내가 방향을 잃고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연 생태, 사회양극화, 인간 소외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이다. 당연히 문제를 풀어가려면 문제를 야기시켜온 주범인 우리들의 실체론적 세계관과 가치의식과 삶의 방식을 고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문제의 책임자가 바로 나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주의와 정부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 문제라고 하고, 기독교는 불교 때문이라고 하고, 진보는 보수 때문이라고 하고, 보수는 진보 때문이라고 하고, 부시는 빈 라덴 때문이라고 하고, 빈 라덴은 부시 때문이라고 하는 식이다. 문제를 정직하게 보고 실상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해답도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를 정직하게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고 길을 찾아보려고 하는 문제의식으로 제시된 것이 생명평화라는 화두이다.

 우리 모두의 염원인 생명 평화의 삶, 생명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내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생명 평화를 중심 화두로 붙잡고 생명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문제를 다뤄야만 우리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그럼 한 번 따져보자. 진보든 보수든 기독교든 불교든, 자본가든 노동자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일찍이 생명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진부하게 또다시 생명 평화인가? 그렇다. 진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평화를 들고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을 면밀히 짚어보자. 생각이나 지식이 아니고 구체적 실상은 어떨까? 하나는 진리의 길에 근거해서 모두 더불어 함께 하는 생명평화를 모색한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길과는 관계없이 나와 우리 집단만을 위한 생명 평화를 모색하는 경우가 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을까? 진리의 정신을 무시한 경우 대부분 패거리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인들이 평화를 이야기할 때에 기독교인들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필연적으로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으로 나타났다. 언제나 명분은 자유, 정의, 평화였지만 역사 현실의 내용은 국가, 종교, 이념, 이익 따위를 내세워 내 편이 아닌 상대편의 생명 평화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형태로 전개되어왔다. 왜 그렇게 될까? 바로 진리의 정신에 근거하지 않고 나와 내 집단의 생각과 필요에 따라 접근했기 때문이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문명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상대의 생명평화를 공격하고 짓밟는 문명사적 비극을 야기시킨 야만성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이 성자와 현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다. 소위 진리의 길이다. 가까운 역사에서 진리의 정신에 따라 비폭력 불복종 행동으로 생명 평화의 길을 열어낸 경우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다. 우리가 진부하고 새삼스럽지만 또다시 생명 평화 화두를 내세운 것은 바로 진보다, 보수다, 좌파다, 우파다, 기독교다, 불교다, 미국이다, 이라크다 하는 패거리 논리를 넘어서는 길을 가지 않으면 그 어떤 길도 희망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진리의 정신으로 패거리 논리를 넘어설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과 자연, 진보와 보수, 기독교와 불교 등 다양한 개성과 가치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모두 더불어 함께 생명평화를 누리는 길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Ⅱ. 생명평화 로고 이야기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운다.”

 전주 한옥 마을에서 본 글이다. 나비가 나비로, 꽃이 꽃으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비움이요 충만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존재 법칙과 질서로 보면 비움과 충만은 늘 동시적이다. 나비가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이 비움과 충만이 동시에 함께 하는 진정한 나비의 온전한 모습이다. 꽃이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는 모습이 비움과 충만이 동시에 함께 하는 진정한 꽃의 온전한 모습이다. 인간들도 꽃처럼 나비처럼 현재를 온전하게 살면 그 삶이 멋지고 평화로워진다는 마음으로 본 주제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성장 과정에서의 내 경험을 말해보겠다.

  첫째, 나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출가했기 때문에 내가 본받아야 할 인간상은 언제나 부처님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거울삼아 내 삶을 가꾸고 다듬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삶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마음 밭 가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밭 가는 삶이다. 이 두 가지 삶에 인생의 전부를 바쳐 헌신한 삶이 부처님의 일생이다. 부처님의 일상적 삶은 매우 단순 소박하다. 매일 매일 문전걸식을 했다. 숲이나 동굴에 머물렀다. 자연 소재의 약을 사용했다. 소유물이란 겨우 갈아입는 누더기 세 벌과 밥그릇 하나 정도였다. 그야말로 최대한 욕심을 줄이고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단순 소박한 삶이었다.

  둘째. “인간적 혈연을 끊고 어버이와 결별하는 것은 진리의 정신인 평등의 길을 가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초발심자경문의 글이다. 왜 진리의 길을 가야하는가? 그래야만 자기완성, 사회완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피를 나눈 애정도 끊고 어버이와 이별하는 것은 너나없이 반드시 가야 할 참된 길, 즉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함인 것이다. 출가의 길은 국가, 종교, 가정, 개인 등 그 어떤 경우에도 사적이고 이기적인 입장이 용납되지 않는다. 출가 수행자는 바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넘어서서 진리의 길을 가고자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오로지 법과 중생을 위해 전 존재를 바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출가수행자인 것이다. 출가수행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과연 종교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어떤 명분으로든 집단세력화, 집단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집단세력화와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세속의 길은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자본가는 자본가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너무나 잘 가고 있다. 종교까지 나서서 집단세력화와 이익을 추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오늘날 한국사회에 종교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정직하게 물어야 할 때라고 본다.

  셋째, 절집의 생활 방식이다. 절집의 생활은 내가 생산 노동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에 필요한 의식주 전반을 신도들에게 의지한다. 대단히 어려운 분들인데도 특별한 마음으로 시주를 한다.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는 할머니를 생각해보라. 무엇이든 내 것으로 움켜쥐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세상 인심인데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피땀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내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마음인가.

  다음은 사하촌 주민들의 고단한 삶이다. 절집 살림이 풍요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하촌 주민들의 삶과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상대적으로 보면 사찰에서 수행자들의 삶은 대단히 풍족하고 편안하다. 궁핍하고 고단한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면 ‘아, 내가 그들에게 얻어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정말 넋 놓고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 성장해오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출가 수행자는 소욕지족의 삶, 단순 소박한 삶을 살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이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무슨 세계관과 철학에 근거한 신념이 아니고 어린 시절 절에서 저절로 길들여진 것이다.

  다음은 생명평화로고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생명 평화 로고는 습관적으로 단순 소박한 삶을 추구해온 나에게 왜 단순 소박한 삶을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세계관의 눈을 갖게 했다. 로고 정신으로 보면 단순 소박하게 살아야 되는 이유는 내 개인이나 국가 사회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고 우주의 존재 법칙과 질서에 맞는 바람직한 삶이기 때문인 것이다. 생명 평화의 삶을 실현하고 누릴 수 있는 올바른 방향과 길을 제시해준 것이 바로 생명평화 로고인 것이다. 

 

 

 이제는 로고 내용을 짚어보자.

세상에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일보다 더 거룩한 일은 없다. 신비한 일도, 기적도 있지 않다. 태양이 곧 내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생물 하나하나가 내 생명을 낳고 길러내고 있다. 돌멩이도 풀 한 포기도, 밥 한 그릇도, 굼벵이 한 마리도 모두가 내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한 모체의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가 없다. 얼마나 대단한가. 너무나 거룩하고 고맙다. 우주 삼라만상 낱낱 존재들이 내 생명을 낳고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한 모체이므로 당연히 하느님처럼, 부처님처럼, 부모님처럼 잘 모시고 섬겨야 옳다. 모심과 섬김이 바로 생명의 법칙과 질서이다. 모심과 섬김이 그대로 사랑이고 자비이다. 생명의 법칙에 따라 나의 모체를 잘 모시고 섬기면 나도 빛나고 그대도 빛나고 우리 모두가 빛나게 된다. 저절로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대단한가. 이게 바로 기적이요, 신비요, 불가사의 아니겠는가.

  

Ⅲ. 단순 소박한 삶

  로고의 세계관으로 보면 단순소박한 삶은 한 마디로 잘 어울리는 삶이다. 자연과 잘 어울리는 삶, 이웃과 잘 어울리는 삶, 상대와 잘 어울리는 삶이 단순 소박한 삶이요 아름답고 향기롭고 평화로운 삶인 것이다. 자연과 잘 어울리려면 당연히 주거 공간을 단순소박하게 하는 것이 맞다. 이웃과 상대와 잘 어울림도 마찬가지다. 어울림의 눈으로 서울이란 도시를 생각해보자. 서울이 자연과 어울리는 도시인가? 서울엔 아예 자연이 없다. 서울에 이웃집과 잘 어울리는 집이 있는가? 건물들과 건물들을 보라. 서울엔 잘 어울리는 이웃집이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두뇌와 자본과 기술과 기계들을 다 동원해서 만든 것이 오늘의 서울인데 어울림을 철저하게 짓밟고 파괴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자연, 이웃, 상대와 잘 어울리는 삶을 사는데도 과연 자연 생태적 문제, 사회양극화문제, 인간소외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존재의 법칙에 따라 자연과 어울리고 이웃과 어울리고 상대와 어울리는 삶을 살면 생명평화의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체적으로 존재의 법칙에 따르는 삶을 살면 그 생명이 안전하다. 주체적으로 존재의 질서와 조화로운 삶을 살면 그 삶이 평화롭다. 주체적으로 존재의 진리에 맞게 살면 그 삶이 자유롭다. 주체적으로 알맞게 갖고 쓰며 사는 단순 소박한 삶을 살면 그 삶이 편안하고 아름답다. 자연과 어울리고 이웃과 어울리고 상대와 어울리는 단순소박한 삶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야 할 바람직한 삶인 것이다.

   

Ⅳ. 공동체 마을 운동

  1. 왜 공동체인가

  마을공동체 운동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공동체마을 운동이라고 한 이유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로고가 말해주고 있듯이 온 우주가 그물처럼 유기적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 하나 하나도 공동체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우주는 본래부터 공동체이다. 지금 여기 나도 본래부터 공동체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굳이 공동체 마을이라고 했다. 우주 자체, 존재 자체가 본래부터 이미 공동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공동체이고 존재 자체가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확신하면 인간 중심,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게 된다. 자연과 내가 본래 공동체인데 어떻게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너와 내가 본래 공동체인데 어떻게 자기중심의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우리가 인간 중심, 자기중심의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주와 존재가 본래부터 공동체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본래 공동체 세계요 존재이므로 중요한 것은 새롭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그럼 본래 공동체인데 다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래 공동체란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신념으로 공동체 삶을 살고 싶은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모여서 공동체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공동체 마음을 낸 사람들이 공동체적으로 잘 살면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공동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 왜 마을인가

  공동체 운동에서 굳이 마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을이야말로 생명평화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람직하게 실현할 수 있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과 질서에 맞는 공동체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곳, 삶을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가꾸어갈 수 있는 곳, 어느 집도 고립되지 않고 이웃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 누구도 적이 되지 않고 동반자로 살아야 하는 곳, 누구도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곳이 마을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과 존재의 질서인 생명평화세계관이 사회로 형상화된 인류 문명의 원형이 마을이다. 21세기 도시 문명의 뿌리이기도 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 마을의 적정한 규모는 작은 초등학교와 작은 중학교가 유지될 수 있는 정도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이웃과 함께 살면서 공부도 하고 사회의 삶도 배워갈 수 있는 규모를 생각해보면 현재 작은 면 단위 정도의 규모가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가 마을 이야기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내 인생을 내가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가야 그 삶이 의미도 있고 매력도 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과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살고 싶은 집을 내 의지대로, 내 꿈대로 짓고 살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농촌 마을에서는 내가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집도 내 뜻대로 지을 수 있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기타의 여러 가지 삶들도 대부분 주체적으로, 자립적으로, 창조적으로 내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도시 공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농촌 마을에서는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개성 있는 삶을 창조적으로 가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농촌 마을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수히 많다.

 

3. 생명평화의 꿈을 실현하는 공동체마을 산내를 꿈꾸며

  그동안 귀농자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다. 개인과 단체가 성공하는 것도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역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웃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결국 지역사회의 불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산내라는 한 지역을 대안적 공동체 마을이 되도록 하려면 지역 주민들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일 때만 가능하다. 주민들이 산내라는 우리 집을 만드는 데에는 그 주체가 정부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고 지자체도 아니며 시의원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인식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주민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갖다 부어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돈이 독이 될 위험성이 높다. 바깥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갖다 주어도 별로 효과를 보기 어렵다. 첫째도 둘째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 스스로가 주인의식으로 주인답게 내가 또는 이웃과 함께 노력해서 만들겠다는 자립적 의지를 갖게 하는 일이 기본이 되지 않는 한 어떤 것을 갖고 와도 실효를 거둘 수 없다. 그동안의 농업 정책의 결과가 오늘의 농촌임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주민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내면민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논의의 장이 있어야 한다. 그 곳에서 충분하게 논의하고 합의하여 자발적으로 실천되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 주민 개개인의 안목과 자질과 역량을 길러내야 한다. 제일 먼저, 삶의 주체인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올바른 판단과 선택, 책임과 권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향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우리 지역, 우리 동네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산내지역의 자연 생태, 역사 문화, 현재적 조건의 가치에 대해 잘 파악하고 알아야 우리 지역만의 개성을 살려내는 멋진 산내를 만들 수 있다.

  셋째, 산내 면민의 민의를 자유롭게 발산시키기도 하고, 우리 지역 산내에 대한 활발한 정보 교환도 펼쳐질 수 있는 대화광장이 운영되어야 한다. 산내 지역 모든 문제를 용해시켜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용광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인 대화광장이 운영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을 전제로 공동체 마을 산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 공동체 마을 산내는 내가 살아가야 할 우리 집임.

□ 산내에 살고 있는 주민은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식구임.

□ 우리 집을 잘 만들고 우리 식구들이 잘 살아가려면 이웃사촌과 품앗이의 삶을 살아야함.

□ 우리 집․우리 식구의 삶을 주민인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자립적이며 창조적으로 함께 만들고 가꾸어야 함.

□ 주민의 삶과 공동체마을 산내가 안정적이고 희망적으로 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만들어야 함.

① 주민․지자체․귀농자․출향인사․귀농자의 지혜와 마음을 온전히 반영하고 합의하는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함.
② 우리 집․우리 식구의 삶의 문제를 투명하고 공평하고 활발하게 다루어갈 대화광장이 펼쳐져야 함.
③ 주민 개개인의 안목과 자질과 역량을 가꾸기 위한 마음밭 가는 일로 마을사랑방대학이 이루어져야 함.
④ 주민 전체의 이익을 창출하는 마을기업을 건설함.
⑤ 주민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마을재단을 설립함.

  ※개인․가족 단위에서 농심으로 농사짓고 농심으로 사는 것과 동시에 우리 식구 산내 주민들이 더불어 함께 산내마을 우리 집을 잘 만들고 가꿔가는 일을 균형있게 할 때 생명평화의 삶․생명평화의 마을이 실현될 수 있다.

 

강사 : 도법스님 소개

  ■ 18세에 집을 떠나 40여 년을 출가수행자로 살았다.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였고, 불교결사체인 <선우도량>을 통해 청정불교운동을 함께 했다.

■ 1990년대 중반 이후 실상사 주지로 지내면서 실상사귀농학교와 중등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를 열었고, 전국적으로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단체를 통해 지역에서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한 기관인 사)한생명을 통해 생태적 지역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다.

■ 그러한 가운데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1000일 기도>를 올리면서 생명평화의 화두와 실천을 사회화하는 기반을 가꾸었다. 지리산공부모임과 지리산 1000일 기도의 뜻에 공감하는 이들과 함께 <생명평화결사>를 만들었고, 2004년 3월 1일부터 2008년 12월 14일까지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 지역을 걷고 지역주민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했다.

■ 생명평화탁발순례를 마치고 지리산으로 돌아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마을 산내>를 가꾸기 위해 여러 모로 모색하고 있다.

  ● 2003년 교보생명 환경문화상 환경운동부문 대상, 2003년 제5회 인제인성대상, 2008년 포스코 청암상 봉사상을 수상하였다.

● 펴낸 책으로 <화엄경과 생명의 질서>(1990), <길 그리고 길>(1995), <화엄의 길 생명의 길>(1999), <청안청락하십니까>(2000), <내가 본 부처>(2001),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2004), <그물코 사랑 그물코 인생>(2008)이 있고, 관련된 책으로는 경향신문의 김택근 논설위원이 기록한 도법스님의 생명평화탁발순례기 <사람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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